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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13년 전에도 갑작스런 사퇴 선언으로 일본을 발칵 뒤집어놨다. 선거에서 야당에 대패하고 국정운영이 마음대로 안되자 도망가는거냐는 식의 질문이 기자회견에서 쏟아졌다. 그런데도 그는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기자회견 다음날 입원한 사실이 알려졌고 열흘쯤 지나 ‘사실은 아팠다’고 털어놨다. 열일곱살에 발병한 희귀병 '궤양성 대장염'이 사임 결심으로 이어졌다고 고백한 건 넉달 뒤였다. 이 병은 복통, 설사, 혈변을 유발하는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증상이 심해진다. 아베 총리는 지금보다 젊었지만 치료법은 훨씬 열악했다. 아파서 그만둔다고 하느니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도망간다고 욕 먹는게 차라리 나았던 모양이다.

아파서 그만두는 것에 일본인들은 유독 인색하다. 개인적인 이유로 집단에 민폐를 끼치는 행위를 극도로 경계하는데다 체력을 정신력과 연관지어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물리적으로 서구에 대항할 수 없었던 일본은 '정신이 물질에 우선한다'는 논리로 국민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그런 생각이 아직까지 뿌리깊게 남아있다.

덕분에 '아프면 쉬라'는 정부의 코로나 지침은 일본 국민들에게 먹히지 않았다. 병가를 거리낌 없이 내는 서구의 직장인들과 달리 일본인들은 감기 증상 정도로 쉬지 않았다. 해열제를 먹고 환자를 진료한 외과의사, 목이 아픈걸 참고 교실에 음식을 배달한 급식 보조원, 감기 증상에도 신칸센을 타고 출장길에 오른 회사원은 결국 바이러스를 옮겼다.

아베 총리의 28일 기자회견은 13년 전과는 딴판이었다. 그는 궤양성 대장염 재발 판정을 받은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 뒤 "체력이 만전(萬全)이 아닌 상황에서 정치 판단을 그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역대 최장수 총리로서 재임기간 이뤄낸 정책 성과와 코로나 긴급대책이 어느정도 마무리 됐기에 가능했을 과감한 결단이었다.

13년 전보다 대내외 여건은 더 안좋아졌지만 일본 언론은 박수치며 그를 떠나보냈다. '귀하게 자란 도련님의 도망' 같은 자극적인 해설 기사를 실었던 과거와 달리 지난 8년 간 아베 총리가 이룬 성과와 비판 받았던 점, 차기 내각의 과제를 냉정하게 분석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장기 집권에 따른 피로감이 컸겠지만 코로나가 아파서 그만두는 이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사회로의 변모를 앞당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18년 일본의 한 마라토너가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구간 종점 300m를 앞두고 골절상을 입었는데, 무릎으로 기어 완주했다. 피를 철철 흘리면서. 이 마라토너는 고작 열아홉이었다. 일본 문화를 오래 연구한 학자들은 이 사건이 일본에서 논란이 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일본이 긍정해온 부상투혼에 위화감을 느끼고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부상투혼’은 우리나라에서도 칭송받던 말이지만, 이제는 사라져야 할 때가 왔다. 집단의 성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권장하는 사회는 건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프면 쉬어야 한다. 짊어진 무게가 무거울수록 더욱 그렇다. 소수의 업무 공백이 조직 운영에 심각한 문제로 이어진다면 업무와 책임이 비효율적으로 배분돼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람을 쥐어짤 게 아니라 인력 재분배를 해야 한다.

13년 전과 180도 달라진 아베의 사퇴 기자회견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이현승 기자 nalhs@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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