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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도 없이 3시간동안 13곡을 홀로 연주한 피아니스트 조성진(30)은 앙코르를 원하는 관객을 향해 양해를 구하는 미소를 지으며 피아노 건반 덮개를 살포시 닫았다. 그리곤 처음 무대에 입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곧은 걸음걸이로 퇴장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가득 메운 2500명의 관객은 아쉽지만 납득했다. 귀는 충분한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조성진은 올해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1875~1935)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피아노 독주곡 12곡과 피아노 협주곡 2곡을 녹음했다. 조성진이 한 작 2저축은행 곡가의 전곡을 녹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연주를 비롯해 라벨 탄생 150주년 기념 연주회로 6월부터 한국에서 전국 투어중이다.
조성진의 라벨 피아노 독주곡 리사이틀이 열린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1층 C구역 21열 6번에 앉았다. 시선은 방해없이 오직 핀조명이 떨어진 그랜드피아노와 조성진을 향했다. 콘서트 sbi인베스트먼트 홀을 가득 메운 2500명 모두 단 한 곳, 단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조성진은 따로 정비시간을 갖지 않고 곧바로 첫 곡 ‘그로테스크한 세레나데’ 연주를 시작했다. 라벨이 18세에 만든 최초의 피아노곡이다. 라벨은 이 작품에서 샤브리에와 사티의 특징을 적절히 사용해 깔끔하면서도 조리있는 구성을 지켰다. 조성진은 건반을 뜯을 듯 했다가 이내 최저가 공구 어루만지면서 눈으로 보아도 즐거운 연주를 보여줬다.



조성진은 라벨 탄생 150주년을 맞아 라벨 전곡을 녹음한데 이어 기념연주회를 국내외에서 이어가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1부는 소품들로 이루어졌는데, ‘고풍스러운 자동대출 미뉴에트’는 역시 라벨이 불과 스무살 때 파리국립음악원 학생 시절 만든 작품임에도 이미 이때부터 자신의 색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해석된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유명한 곡이지만 정작 라벨은 “빈약한 형식을 지니고 있다”라며 과소평가했다고 한다. 제목은 다소 어두울 것이란 인상을 주는 반면, 에드몽 드 폴리냑 공작부인의 살롱에 드나들 당시 만든 곡 통신연체자 핸드폰개통 으로 기분 좋은 살롱풍의 여유로운 노곤함이 특징적이다. ‘물의 유희’는 6분 길이이지만 라벨의 걸작 중 하나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는 작품이다. 물의 정체된 움직임과 격렬한 소용돌이 등 다양한 물의 흐름과 표정을 표현했다. 세 악장으로 이뤄진 군더더기 없는 ‘소나티네’를 끝으로 1부가 끝나고 인터미션으로 들어갔다. 조성진은 일어나 검은색 수트의 버튼을 잠그고 인사했다.
2부는 긴 호흡의 두 곡만으로 프로그램이 짜였다. 1부 때도 곡과 곡 사이에 잠시 멈춰 손과 건반위의 땀을 닦았던 조성진은 이제 라벨이 최고의 기교를 달성한 ‘거울’과 ‘밤의 가스파르’를 선보일 차례였다.
1906년 초연된 ‘거울’은 1곡-나방, 2곡-슬픈 새들, 3곡-대양 위의 조각배, 4곡-어릿광대의 아침노래, 5곡 골짜기의 종으로 진행된다. 이중 가장 유명하고 화려하고 기교적으로 어려운 네번째 ‘어릿광대의 아침노래’에 들어가기 전 조성진은 잠시 쉬어갔다. 이 곡은 스페인적 정서와 무곡에 대한 라벨의 세련된 감각이 적절하게 결합된 명곡으로 평가된다. 기교적으로는 숨쉴 틈 없는 연타에 이중의 글리산도 등이 포함돼 있다.
이제 ‘밤의 가스파르’를 선보일 차례가 왔다. 라벨은 스스로 ‘가장 어려운 작품을 쓰겠노라’ 공언했고, 그 목표를 이뤘다. 가스파르란 고대 페르시아에서 왕실의 보물을 지키는 사람을 뜻한다. 1곡-온딘(물의 요정), 2곡-교수대, 3곡-스카르보(장난꾸러기 요정)로 구성돼있다. 특히 ‘스카르보’는 장난꾸러기 요정에 걸맞게 사람들을 놀래키고 헤집어 놓듯 기교를 극한까지 추구하는 파트다. 조성진은 온몸으로 연주했고, 그를 보는 관객도 함께 체력이 소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두번째 인터미션 후 마지막 3부가 시작됐다. ‘하이든 이름에 의한 미뉴에트’,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 ‘프렐류드’, ‘보로딘 풍으로’, ‘샤브리에 풍으로’에 이어 ‘쿠프랭의 무덤’을 피날레로 장식했다.
‘쿠프랭의 무덤’은 라벨의 마지막 피아노 작품이다. 라벨의 작품 중 유일한 푸가(다성음악에 의한 대위법적 모방의 한 기법으로, 하나의 선율을 한 성부가 연주한 뒤 이를 따라 다른 성부가 다른 음역에서 모방하는 것을 특징으로 함)이며, 귀족적인 정서가 가득한 걸작으로 불린다. 1~6곡으로 이뤄졌는데 특히 6곡 ‘토카타’는 연타의 테크닉과 쉴 새 없이 균등하게 움직이는 16분음표들로 채워져있다. 최후의 클라이막스에서는 장대함이 가득 채운다.



3시간의 연주가 끝나고 기립박수가 이어지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마지막 음을 치고 그 여운을 끝까지 전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난 조성진의 머리카락은 처음 등장과 비교해 확연히 부스스한 상태였다. 혼신의 힘을 다한 차력쇼같은 3시간의 연주가 여실히 느껴졌다.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커튼콜로 등장한 조성진은 피아노앞으로 다가가더니 장난스러우면서도 양해를 구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덮개를 닫았다. 그렇게 미련 하나 남지 않는 최고의 3시간이 막을 내렸다.
이민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