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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1940~2025년 5월3일) 교수님이 주님의 품에 안겼다. 어디서부터 그분에 대한 기억을 퍼 올려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 진보 신학계의 마지막 자존심, 이웃 종교와의 대화와 상생을 주도하면서 대승적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신학자 등 많은 말로 설명할 수 있겠으나, 내게 있어 그분은 초·중등 시절 우리 교회 목사님이셨다. 한번은 중학교 여름 수련회에 가서 장기자랑을 했는데 내가 노래를 불렀다. 민혜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곡이었다. 교회 수련회 가서 복음성가 대신 대중가요를 부르는 나를 보면서, 그것도 내 인생은 주님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라는 불손한 가사를 부르는 중학생을 향해 빙그레 웃 체증식 상환방식 어주시는 목사님 때문에 나는 교회란 자유롭고 억압이 없는 곳이구나, 라는 생각을 처음 했더랬다.



고인의 빈소 모습. 이상철 원장 제공


담임목사와 주일학교 학생의 관계로 맺어진 선생과의 인연은 한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하 한국저축은행안전 면서 사제지간으로 발전하였다. 신학교 1학년 1학기 첫번째 강의 제목이 ‘신학입문’이었는데 담당교수가 김경재였다. 수업이 끝나고 한참은 자리에 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교수님의 신학강의 때문에 정신적으로 가위가 눌려 꼼짝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가위가 풀리는 동안 신학은 아름다운 것이고, 신학은 그래서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신학으로 세상을 바꿀 애드온시스템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했다.
무엇을 배웠는지 지금은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우리 모두는 선생의 강의에 홀려 있었던 것 같다. 분명 유시민 같은 달변은 아니었는데 떨리는 듯하고 겸손한 어조, 하지만 순간순간 단호한 교수님의 말투에는 리듬감이 있었다. 매주 칠판은 한국어, 한자, 영어, 라틴어, 헬라어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실로 언어 카드모집인조회 의 대향연이었다. 그것들이 지워질 때마다 공기를 가르며 내려앉던 분필 가루의 낙하, 그 사이에서 끄적거리던 급우들의 필기 소리, 무엇보다 수업 사이사이 절묘하게 배치되는 선생의 침묵은 강의 전체에서 여백을 만드는데 어떤 날은 그 공백이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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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에게 있어 신학사는 뿌리에서 시작되어 줄기를 거쳐 가지로 뻗어 나가는 기-승-전의 수미일관한 대문자 역사가 아니다. 마치 미술 화법에 등장하는 점묘화와 닮았다. 무수히 많은 점이 우발적으로 모여 모자이크를 이루는 기법 말이다. 이런 선생의 글에는 위계화된 정사(正思), 정통(正統), 정행(正行)에 대한 거리 두기가 있다. 그것들을 존중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거기에서 빠져나가는 신학적 틈과 잉여를 포착하여 신학화하는 능력에서 김경재는 탁월했다.
선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고 상냥하고 섬세했다. 하지만 기준선을 절대 낮추시는 분은 아니었다. 학생들의 눈높이를 존중하지만 신학의 수준을 하향 조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올라설 것을, 고양될 것을 단단한 어조로 주문하셨다. 그는 선생의 기대에 못 미쳐 괴로워하는 제자들을 지켜봐 주고 기다려주는 스승이었다. 어쩌다 제자들이 글을 발표하고 책을 출판하여 헌정할 때면 제일 먼저 독자가 되어 기쁜 마음으로 읽어주시고는 덕담과 기대를 적은 긴 글을 보내주시던 분이셨다.



5월8일 서울 수유리 한신대 신학대학원 앞 풍경. 김경재 교수 추모현수막이 학교 교문에 걸려 있고, 화계사로 올라가는 골목길에는 한신대 신학대학원 학생회에서 내건 “부처님 오신 날을 함께 기뻐합니다” 현수막이 걸려있다. 한신대 신학대학원과 화계사는 석탄일과 성탄일에 서로를 축복하는 현수막을 골목에 걸어준다. 이 이벤트의 중심에는 김경재 교수님이 계셨다. 비록 님은 갔지만 여전히 수유리 신학대학원에는 그의 정신과 흔적이 짙게 배어 있다. 이상철 원장 제공





한신대 신학대학원 학생회에서 내건 “부처님 오신 날을 함께 기뻐합니다” 현수막. 이상철 원장 제공.


그는 교회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현실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고, 특별히 극우세력의 뒷배로 전락한 한국 개신교를 향해서는 강한 톤으로 비판하셨다. 선생은 자신이 목회를 하였던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 교단과 평생 가르쳤던 한신(대학교)의 진보적 신학이 현실을 견인하기는커녕 시류에 휩쓸려 뒤로 퇴보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치며 눈물로 기도하였다. 이러한 스승의 강한 주문이 유약한 후학들을 부끄럽게 하였고, 깨어있게 만들었다. 선생이 사라진 지금, 누가 우리를 야단칠 수 있을지, 누구에 기대어 그 힘으로 소리칠 수 있을지…. 그래서 선생의 빈자리가 총 맞은 것처럼 아프고 크다.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현실과 시류 휩쓸려 퇴보하는 진보 신학 안타깝게 생각하며 눈물로 기도
청년 시절 온갖 사회과학 책을 읽으면서 자랑질, 싸움질, 큰소리치고 허세를 부렸지만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았던 쓸쓸함과 지루함과 헛헛함이 내게는 있었다. 하지만 선생의 강의와 설교를 통해 잠시나마 그 불안을 잠재우고 겨우 성스러운 시간 속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나를 현혹하는 사이비 우상으로부터 벗어나 ‘지금-여기’서 벌어지는 사건이 더 신뢰할 만한 신의 사인(sign·신호)이라는 사실임을 알았던 것도, 우리의 삶과 진리가 서로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것도, 신학이란 결국 가려지고 잊히는 존재들을 향한 달음질임을 자각하게 된 것도 모두 그의 가르침 덕이다. 이 말을 직접 선생에게 건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애석하다.
이제, 우리들의 교수님, 나의 선생님 김경재 목사님을 하늘로 보낸다. 더는 아파하지 마시고, 부디 편안하게 잠드세요. 선생님이 없는 세상에서 신학을 한다는 것이 천형(天刑)이 되겠지만, 그래도 선생님 유지를 이어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정진하겠습니다. 하늘에서 그동안 보고 싶어 하시던 김재준 목사님, 함석헌 선생님과 만나 못다 한 이야기 도란도란 나누시다가 가끔씩 이 땅에서 애쓰는 저희들 내려다보시면서 응원도 하고 기도도 해주세요.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이상철/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한신대 신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