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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신화를 끌어들여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는데, 대개는 플라톤 자신이 지어낸 것이었다. 대화편 ‘파이드로스’에도 문자의 탄생에 얽힌 신화 한편이 등장한다. 테우트라는 신이 문자를 발명해 이집트 왕 타무스에게 가져갔다. 테우트는 문자가 기억력을 높여주어 이집트인을 더 지혜로운 사람들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문자는 “기억의 약이자 지혜의 약”이다. 타무스는 테우트의 선물에 감사하기는커녕 이렇게 되받았다. “문자는 인간의 기억하는 힘을 빼앗고, 사람들에게 지혜를 얻었다는 환상만 심어준다.” 글로 쓰여 있으므로 굳이 기억 속에 심으려 하지 않을 것이 재테크란 며, 글을 읽는 것만으로 진리를 알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라는 얘기다.
이 신화를 실마리로 삼아 플라톤은 문자, 곧 ‘글로 쓰인 말’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글은 그림을 닮았다. 그림 속 사람은 살아 있는 듯 서 있지만 다가가서 말을 걸면 응답이 없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을 읽다가 궁금한 것이 생겨서 물음을 던지면 기숙사 성추행 글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글은 표정도 자세도 바꾸지 않고 처음 쓰인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뿐이 아니다. 일단 글로 쓰고 나면 글은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이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아무에게나 굴러다닌다. 누구에게 약이 되고 누구에게 독이 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글은 잘못 이해되고 욕을 먹더라도 자신을 대신저축은행 연봉 방어하지 못한다. 글을 쓴 사람이 나서서 해명하지 않는 한, 오해를 막을 길이 없다. “글이 일단 주인을 떠나면 어떤 대접을 받든 주인은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플라톤은 말을 글에 맞세운다. ‘말 곧 음성언어’는 ‘글 곧 문자언어’와 달리 고정돼 있지 않다. 음성언어는 살아 있는 언어이고 혼이 깃든 언어다. 음성언어는 대화할 상대를 고를 환승론이용 수 있고, 그 상대 혼에 참된 앎을 새겨 넣을 수 있다. 반대로 자질 없는 사람을 만나면 침묵을 지킴으로써 말이 헛되이 흩어지지 않게 할 수 있다. 문자언어에는 이런 능력이 없다. 문자언어는 음성언어의 그림자일 뿐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음성언어는 ‘목소리로 주고받는 대화’를 뜻한다. 이때의 대화는 우선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 경기도급식비 이의 대화’다. 플라톤은 말한다. “가르치는 사람이 좋은 혼을 지닌 사람을 택한 다음, 대화의 기술을 이용해 그 혼에 앎을 심고 그 씨를 뿌린다면 머잖아 열매를 거둘 것이다. 열매는 또 다른 씨앗을 품고 있으니 씨앗이 씨앗을 낳음으로써 말은 영원히 살아 있게 될 것이다.” 음성언어는 그렇게 영생한다. 반면에 문자언어는 좋은 혼을 만나기 어렵고 씨를 뿌려도 싹을 틔우지 못하고 죽어버리기 쉽다.
플라톤은 문자언어를 거부하고 음성언어만 언어다운 언어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플라톤의 삶은 기이한 자기 배반으로 이어져 있다. ‘파이드로스’가 글로 쓴 책이라는 것부터가 모순적이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를 쓰고 난 뒤에도 ‘소피스테스’ ‘정치가’ ‘티마이오스’ ‘법률’ 같은 중요한 저작을 계속 썼다. 갈대 펜에 검은 잉크를 찍어 파피루스에 글을 적었다. 80살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은 사람이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왜 쉬지 않고 글을 썼을까?
플라톤이 쓴 글은 거의 전부가 대화편이다.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나와 배움에 열의가 있는 젊은이를 앞에 놓고 대화를 통해 앎으로 이끌어간다. 책 속의 대화는 현실의 대화처럼 걸핏하면 딴 길로 새고, 엉뚱한 말이 끼어들어 흐름을 방해하고, 본론으로 돌아와서도 말끔히 결론이 나지 않는 때가 많다. 어쩌면 플라톤은 글의 허약성을 절감하면서도 글을 최대한 말에 가깝게 씀으로써 목소리의 공간적, 시간적 한계를 넘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을 직접 가르칠 수 없으니 우선 대화로 된 글을 써서 그 아쉬움을 달래자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플라톤에게 글은 말을 대리하고 보충하는 두번째 언어였으리라.
플라톤이 문자언어를 음성언어보다 저급한 언어로 생각했음은 분명하다. 말과 글에 대한 플라톤의 이 태도를 공적 논쟁의 장으로 올려놓은 사람이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다. 데리다는 대표작 ‘그라마톨로지’(1967)에서 글보다 말을 높이는 플라톤의 태도를 ‘음성언어 중심주의’라고 규정하고, 음성언어 중심주의가 서양 형이상학의 2500년 역사를 지배했다고 말한다. 음성언어야말로 진리가 드러나는 장이며 문자언어는 기껏해야 진리의 흐릿한 자국을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 서양 철학의 주된 관념이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음성언어 중심주의가 20세기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문트 후설과 구조주의 운동을 이끈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에게까지 이어진다고 말한다. 데리다의 주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데리다는 문자언어가 음성언어보다 더 근원적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음성언어 이전에 ‘근원 문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생명체의 유전자 본체(DNA)를 이루는 염기 구조를 거론한다. 아데닌(A), 구아닌(G), 티민(T), 시토신(C)으로 이루어진 염기 구조야말로 문자 이전의 문자, 근원 문자가 생명 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근원 문자가 언어의 토대가 됐다. 그러므로 말이 글보다 우월하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데리다의 가설은 도발적이어서 흥미를 자극한다. 하지만 플라톤의 주장이 신화적 상상력에 입각해 있듯이, 데리다의 생각도 자기 나름의 상상력에 기대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문자언어든 음성언어든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음성언어가 더 생생하게 생각을 전할지는 몰라도 그 쓰임에 한계가 있음은 분명하다. 문자언어는 널리 전파될 수 있고 오래 보전할 수 있다. 문자로 기록된 책이 없었다면 인류의 문화가 이토록 고도화하고 풍요로워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문자언어도 음성언어도 각자의 기능과 구실이 있다. 핵심은 인간의 정신과 문화가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문자언어가 됐든 음성언어가 됐든 언어가 없었다면 인류의 삶도 없었을 것이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의 절반을 할애해 계몽주의 시대 사상가 장자크 루소의 언어이론을 독해한다. 그 텍스트가 ‘언어의 기원에 관한 시론’이다. 이 시론에서 루소는 언어의 기원을 남방과 북방으로 나누어 살핀다. 애초에 언어가 생겨난 곳은 따뜻하고 살기 좋은 남방이었다. 이 지역에 살던 원시 인류가 만들어낸 언어는 ‘정감의 언어’였다고 루소는 말한다. 연민이나 격정을 느낄 때 그 마음을 표현하는 소리가 말이 됐다는 것이다. 루소가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서 언어가 자라났다.
그러다 인구가 늘어 북방으로 이주한 뒤에 사태가 달라졌다. 북방의 황량한 땅은 원시 인류를 추위와 기아로 내몰았는데 여기서 북방의 언어가 생겨났다. 삶의 결핍을 해결하려는 욕구 속에서 거칠고 공격적인 언어, 가슴보다 머리를 쓰는 언어가 발달했다. 남방의 언어는 정감의 언어, 사랑의 언어이고, 북방의 언어는 결핍의 언어, 이성의 언어다. 루소는 이 남방의 언어가 정치공동체를 세우는 데 기초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랑의 언어만으로 정치공동체를 만들 수는 없다. 루소도 그런 사실을 인정한다. 나라를 세우고 이끄는 데는 이성의 언어가 없으면 안 된다.
모든 공동체는 언어공동체다. 언어가 공동체의 토대이고 혈관이다. 그 언어가 어떤 수준의 언어냐에 따라서 공동체의 질이 결정된다. 연민에 바탕을 둔 이성의 언어는 공동체를 높이지만, 탐욕을 동력으로 삼은 기만의 언어는 공동체를 갉아먹는다. 더 무서운 것은 정치 언어의 타락이다. 정치 언어는 압도적인 위력을 지녔기에 그 언어의 타락은 나라 전체의 타락을 불러온다. 민주주의와 민주 헌정을 파괴하는 내란 행위를 ‘자유대한민국’을 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구국의 결단인 양 묘사하는 정치 언어는 언어의 몰락이고 죽음이다. 그런 언어를 실어 나르는 미디어는 자멸을 선동하는 미디어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생각을 표현한다. 그 언어가 일그러지면 우리의 생각도 일그러진다. 언어는 눈이고 창이다. 언어가 이기심에 갇혀 있으면 우리는 넓게 볼 수 없고 높게 볼 수 없다. 우리 공동체가 사람 사는 공동체가 되려면 언어가 맑아져야 한다. 좋은 정치는 언어를 정련함으로써 공동체를 일으켜 세운다. 우리의 공동체 언어는 탐욕의 언어, 짐승의 울부짖음을 넘어 더 멀리 날아야 한다.
고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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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이 아니다. 일단 글로 쓰고 나면 글은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이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아무에게나 굴러다닌다. 누구에게 약이 되고 누구에게 독이 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글은 잘못 이해되고 욕을 먹더라도 자신을 대신저축은행 연봉 방어하지 못한다. 글을 쓴 사람이 나서서 해명하지 않는 한, 오해를 막을 길이 없다. “글이 일단 주인을 떠나면 어떤 대접을 받든 주인은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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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 말하는 음성언어는 ‘목소리로 주고받는 대화’를 뜻한다. 이때의 대화는 우선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 경기도급식비 이의 대화’다. 플라톤은 말한다. “가르치는 사람이 좋은 혼을 지닌 사람을 택한 다음, 대화의 기술을 이용해 그 혼에 앎을 심고 그 씨를 뿌린다면 머잖아 열매를 거둘 것이다. 열매는 또 다른 씨앗을 품고 있으니 씨앗이 씨앗을 낳음으로써 말은 영원히 살아 있게 될 것이다.” 음성언어는 그렇게 영생한다. 반면에 문자언어는 좋은 혼을 만나기 어렵고 씨를 뿌려도 싹을 틔우지 못하고 죽어버리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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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 쓴 글은 거의 전부가 대화편이다.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나와 배움에 열의가 있는 젊은이를 앞에 놓고 대화를 통해 앎으로 이끌어간다. 책 속의 대화는 현실의 대화처럼 걸핏하면 딴 길로 새고, 엉뚱한 말이 끼어들어 흐름을 방해하고, 본론으로 돌아와서도 말끔히 결론이 나지 않는 때가 많다. 어쩌면 플라톤은 글의 허약성을 절감하면서도 글을 최대한 말에 가깝게 씀으로써 목소리의 공간적, 시간적 한계를 넘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을 직접 가르칠 수 없으니 우선 대화로 된 글을 써서 그 아쉬움을 달래자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플라톤에게 글은 말을 대리하고 보충하는 두번째 언어였으리라.
플라톤이 문자언어를 음성언어보다 저급한 언어로 생각했음은 분명하다. 말과 글에 대한 플라톤의 이 태도를 공적 논쟁의 장으로 올려놓은 사람이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다. 데리다는 대표작 ‘그라마톨로지’(1967)에서 글보다 말을 높이는 플라톤의 태도를 ‘음성언어 중심주의’라고 규정하고, 음성언어 중심주의가 서양 형이상학의 2500년 역사를 지배했다고 말한다. 음성언어야말로 진리가 드러나는 장이며 문자언어는 기껏해야 진리의 흐릿한 자국을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 서양 철학의 주된 관념이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음성언어 중심주의가 20세기 현상학의 창시자인 에드문트 후설과 구조주의 운동을 이끈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에게까지 이어진다고 말한다. 데리다의 주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데리다는 문자언어가 음성언어보다 더 근원적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으로까지 나아간다. 음성언어 이전에 ‘근원 문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생명체의 유전자 본체(DNA)를 이루는 염기 구조를 거론한다. 아데닌(A), 구아닌(G), 티민(T), 시토신(C)으로 이루어진 염기 구조야말로 문자 이전의 문자, 근원 문자가 생명 세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근원 문자가 언어의 토대가 됐다. 그러므로 말이 글보다 우월하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데리다의 가설은 도발적이어서 흥미를 자극한다. 하지만 플라톤의 주장이 신화적 상상력에 입각해 있듯이, 데리다의 생각도 자기 나름의 상상력에 기대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문자언어든 음성언어든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음성언어가 더 생생하게 생각을 전할지는 몰라도 그 쓰임에 한계가 있음은 분명하다. 문자언어는 널리 전파될 수 있고 오래 보전할 수 있다. 문자로 기록된 책이 없었다면 인류의 문화가 이토록 고도화하고 풍요로워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문자언어도 음성언어도 각자의 기능과 구실이 있다. 핵심은 인간의 정신과 문화가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문자언어가 됐든 음성언어가 됐든 언어가 없었다면 인류의 삶도 없었을 것이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의 절반을 할애해 계몽주의 시대 사상가 장자크 루소의 언어이론을 독해한다. 그 텍스트가 ‘언어의 기원에 관한 시론’이다. 이 시론에서 루소는 언어의 기원을 남방과 북방으로 나누어 살핀다. 애초에 언어가 생겨난 곳은 따뜻하고 살기 좋은 남방이었다. 이 지역에 살던 원시 인류가 만들어낸 언어는 ‘정감의 언어’였다고 루소는 말한다. 연민이나 격정을 느낄 때 그 마음을 표현하는 소리가 말이 됐다는 것이다. 루소가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서 언어가 자라났다.
그러다 인구가 늘어 북방으로 이주한 뒤에 사태가 달라졌다. 북방의 황량한 땅은 원시 인류를 추위와 기아로 내몰았는데 여기서 북방의 언어가 생겨났다. 삶의 결핍을 해결하려는 욕구 속에서 거칠고 공격적인 언어, 가슴보다 머리를 쓰는 언어가 발달했다. 남방의 언어는 정감의 언어, 사랑의 언어이고, 북방의 언어는 결핍의 언어, 이성의 언어다. 루소는 이 남방의 언어가 정치공동체를 세우는 데 기초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랑의 언어만으로 정치공동체를 만들 수는 없다. 루소도 그런 사실을 인정한다. 나라를 세우고 이끄는 데는 이성의 언어가 없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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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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