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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된 고대 원형경기장에서의 한여름 밤 라이브 공연. 매년 6~9월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열리는 오페라 페스티벌은 낭만의 극치다. 한 가지 복병은 있다. 알프스산맥을 넘어온 습한 공기가 뜨거운 여름 지열과 만나 쏟아내는 소나기가 야외 공연을 방해하곤 한다. 올해 25주년을 맞는 페스티벌의 유일한 발레 프로그램 '로베르토 볼레와 친구들' 갈라쇼를 앞두고 있던 지난달 23일은 공연 1시간 전 맹렬한 뇌우가 시작돼 개최 여부가 불투명했다.
비 내리는 야외 공연은 함부로 강행되진 않는다. 과매도
대신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린다. 공연 시작 후 비가 오면, 중단하고 기다렸다가 다시 연다. 궂은 날씨에도 객석 대부분을 채운 관람객은 공연 시간인 오후 9시 30분 이후에도 우비로 무장한 채 비를 맞으며 기약 없이 자리를 지켰다. 다행히 점차 빗줄기가 약해져 약 40분 지연된 끝에, 간간이 번개로 번쩍이는 하늘 아래서 공연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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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나 아레나 오페라 페스티벌 중 이탈리아 발레리노 로베르토 볼레가 25년째 이어온 '로베르토 볼레와 친구들' 갈라 쇼에서 드뷔시 '달빛'에 맞춘 안무를 선보이고 있다. 베로나 아레나 재단·ⓒAndrej Upen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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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는 여전히 탄탄한 몸으로 다양한 컨템퍼러리 안무를 소화했고, 유럽 내 유수의 발레단에서 초청된 무용수들은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황홀한 몸짓을 선보였다. 하이라이트는 밀라노 라스칼라 발레단 수석 니콜레타 마니와 티모페이 안드리야셴코가 선보인 '로미오와 줄리엣' 중 발코니 파드되(안무 케네스 맥밀런). 아레나의 계단 등 지형지물을 활용한 연출로 마치 16세오락실황금성
기 두 주인공이 눈앞에 실존하는 듯한 황홀함을 자아냈다.
실제 셰익스피어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었던 관광 소도시 베로나는 이맘때면 전 세계 클래식 팬들로 북적인다. 1913년 시작된 오페라 축제는 올해 102회째를 맞기까지 베르디·푸치니·로시니 등 이탈리아 작곡가를 중심으로 초대형 프로덕션으로 선보이며 세계적 명소로 자리 잡았다. 오늘의상한가
지난해엔 역대 최고 수익인 3362만유로(약 544억원)를 거뒀다. 매년 5~6개의 오페라와 발레 갈라·콘서트를 선보이며,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2만여 석 규모의 대규모 연출과 세계적 스타 성악가들의 무대로 50여 일을 채운다. 도시 인구 25만명을 훌쩍 뛰어넘는 42만명(지난해 기준)이 객석을 채우는데, 관객 중 57%는 이탈리아를 제외한 세계 136개국에서 온다. 독일·미국·캐나다·스페인 등 영미권뿐 아니라 우리나라 관객 수도 증가세다.
서기 30년에 세워진 고대 아레나는 어디에 앉든 탁 트인 시야와 생생한 음향을 선사한다. 로마시대엔 검투사들의 경기장, 중세엔 법원, 르네상스 시대엔 마상 경기장으로 쓰였고, 1850년 이후 오페라극장이 됐다. 꼭대기 층 좌석이 한여름의 열기를 흡수한 딱딱한 돌계단이라 방석을 깔고 앉아야 한다는 불편함만 감수하면 된다. 무대에서 가까운 앞쪽 좌석들은 등받이 의자가 설치돼 관객 편의성을 높였고, 장애인 관객을 위한 배리어프리 제도도 마련돼 있다.



제102회 베로나 아레나 오페라 페스티벌 중 스테파노 포다 연출로 새롭게 선보인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전경. 성경 속 바빌로니아인과 유대인의 대립을 다룬 이야기를 보편적 갈등으로 확대한 주제 의식이 무대 중앙 'VANITAS'(덧없음)라는 라틴어와 모래시계, 둘로 쪼개진 원자 모형 등을 통해 드러난다. 작은 사진은 주역 아비가일레 역을 맡은 세계적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베로나 아레나 재단


올해 축제의 개막작은 작곡가 베르디를 국민 영웅으로 만든 대표작 '나부코'였다. 바빌로니아 왕 나부코(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을 포위하며 벌어지는 권력과 신앙, 민족 간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1842년 밀라노 초연 당시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했고, 1901년 베르디 장례식에서도 이 작품의 합창곡 '날아라, 금빛 날개를 타고'(히브리 노예들의 합창)가 불려 상징성이 크다.
스테파노 포다 연출로 새롭게 선보인 이번 나부코는 고대 극장을 배경으로 한 현대적이고 대담한 해석이 돋보였다. 포다는 앞서 2023년 축제 100주년을 기념한 '아이다' 새 프로덕션에서도 미래지향적 분위기를 풍겼는데, 이번에도 첨단 소재 의상과 네온사인 등으로 특정 지역·시대·종교를 드러내지 않았다. 포다는 연출 노트에서 "바빌로니아인과 유대인의 대립을 믿음과 이성, 집단과 개인, 과거와 미래의 대립을 담은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했다"며 "모든 개인이 가진 내적 갈등과 다층적 정체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두 개로 쪼개진 원자 조형물이 공연 내내 무대 위에서 천천히 회전했는데, 각도에 따라 모래시계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대 중앙엔 'VANITAS', 즉 인생과 권력의 덧없음을 의미하는 문구가 자리했다.



연출가가 덧입힌 해석과 의도는 세계적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열연한 주인공 아비가일레를 통해 드러났다. 아비가일레는 나부코의 양딸로, 자신이 노예 출신이었다는 사실에 자격지심을 품고 왕위를 찬탈한다. 그러나 결국 사랑도, 권력도 잃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캐릭터다. 공연 내내 분열돼 있던 조형물이 비극적 결말 이후 비로소 하나로 합쳐지는 장면은 극단으로 갈라져 있던 내면세계의 화해와 해방을 상징하는 듯 보였다.
지난달 24일 무대에서 네트렙코는 완벽한 음정과 기교, 전투 장면까지 소화하는 성숙한 연기로 큰 환호를 받았다. 그는 애초 이번 축제의 '아이다' 무대에도 서기로 했다가 개인적 이유로 취소했고, 다행히 나부코 출연은 예정대로 진행했다. '모래시계' 소품을 활용해 상징성이 돋보였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순서엔 대다수 관람객이 스마트폰을 들고 촬영하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이스라엘 출신 마에스트로 핀카스 스타인버그(80)의 오케스트라 지휘가 웅장함을 더했고, 공연 중 가장 긴 박수와 '비스(앙코르)' 요청이 쇄도했다. 이날 나부코 역을 맡은 몽골 바리톤 아마르투브신 엥흐바트, 이스마엘레 역의 멕시코계 미국인 테너 갈레아노 살라스 등도 호연을 펼쳤다.
다음 날 같은 장소에서 펼쳐진 베르디의 또 다른 명작 '라 트라비아타'는 다른 시공간에 온 듯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2011년 초연된 휴고 드 아나의 연출작으로, 거대한 액자 틀 속에 19세기 의상을 입은 등장인물들이 올라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고전 명작의 분위기를 되살렸다. 화류계 여성 비올레타와 귀족 알프레도 사이의 이뤄지지 않는 비극적 사랑은 이탈리아 소프라노 로자 베올라와 러시아 유명 테너 드미트리 코르차크가 연기했다. 두 사람 사이를 반대하면서도 인간적 면모를 지닌 알프레도의 아버지 조르주 제르몽 역에는 앞서 나부코 역으로도 활약한 엥흐바트가 안정적인 가창과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았다. 엥흐바트는 2012년 중국에서 열린 오페랄리아 우승자 출신이기도 하다.



올해 베로나 아레나는 9월 6일까지 이어지는 축제에서 베르디의 '아이다'와 '리골레토', 비제의 '카르멘' 등도 선보인다. 요나스 카우프만 리사이틀(8월 3일) 등 콘서트 프로그램도 다채로웠다. 내년 축제는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의 새 프로덕션 초연으로 개막한다. 올해 선보인 포다 연출 버전 '나부코' '아이다'와 함께 전설적 연출가 프랑코 제피렐리의 '아이다'를 나란히 배치한 점도 관전 요소다. 올해는 만나볼 수 없었던 푸치니 명작 '라 보엠'과 '투란도트'도 내년 프로그램에 포함됐다. 무엇보다 내년 베로나 아레나는 2026년 2월 열리는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폐막식과 패럴림픽 개막식이 열릴 장소로 낙점돼 세계인과 만난다.
[베로나 정주원 기자]